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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와 같이
2018-09-06 09:19:29   조회:81회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와 같이

_ 월송(月松) 일수(一守)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흔한 말이지만, 그 말의 무게가 실로 천금같이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봉암사에서 정진을 하던 중, 나름에는 환희심과 기백이 넘쳐나다 보니 내 나름대로 여러 시도를 해 보았다. 그중 하나가 오후불식을 하며 묵언을 하는 것이었다.

원래 오후불식을 할 때는, 밥을 먹지 않더라도 공양 시간에 나와 앉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절집 대중생활이다. 하지만 공부 욕심이 앞서 있던 나는 입승의 허락을 구해 공양 시간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 포행을 돌았다.

오직 화두에 대한 생각밖에는 없어 배가 고픈 줄 몰랐기에 오후 불식은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묵언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찌나 말을 하고 싶은지, 꾹 참고 있다가도 뭔 일이 생기기만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 말이 튀어나왔다.


말하는 습관을 제어하는 일조차 그토록 어렵고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걸 지켜보며, ‘습관 하나 바꾸기가 도()’라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묵언에 대한 개념도 확실히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해 보려는 마음만 앞서다 보니 묵언은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저 공부상을 일으킨 정도로 여기며 흐지부지 묵언을 하던 중에, 당시 봉암사의 조실인 서암 스님을 우연찮게 뵙게 됐다.

포행을 마친 후 절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저녁공양을 끝낸 서암 스님이 내려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스님께서 갑자기 길 한 쪽에 쪼그리고 앉으셨다. 묵언중이라 그저 합장만 하고 몇 발자국 지나치는데, 스님께서 나를 건드려 보려는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묵언중인 사실도 잊고 가던 길을 돌아와 먼저 질문을 했다.


조실 스님께 한마디 여쭙고자 합니다. 성철 스님께선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박에 깨쳐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주장하셨는데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좌라면 돈오돈수(頓悟頓修)를 해야지!”

그렇다면 어떤 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입니까? 스님께서도 돈오돈수가 돼 있으십니까?”


  돈오돈수가 가능한지에 대해 궁금했던 터라,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건방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때 한 무리의 대중이 산모퉁이를 돌아 올라오는 바람에 자연스레 대화가 끊어졌다.

서암 스님과 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도량 근처에까지 이르렀다. 당신의 처소와 선방이 갈라지는 길에서, 아무런 말씀이 없던 서암 스님이 입을 떼셨다.


스님, 벼가 잘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지요. 수행도 마찬가지라,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잘 익어가는 벼와 같다오. 공부가 잘될 때일수록 그 말을 부디 명심하시어 계속 정진하십시오.”


서암 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 처소로 올라가셨다. 봉암사의 힘찬 기운과 환희심에 들떠 있던 마음이 그 말씀 한마디에 다소곳이 가라앉았다. 절에서 가장 궂은일인 정통을 하면서까지 하심을 지키고자 했던 마음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에 다시 상()이 차올랐던 그때, 어른 스님의 법문 같은 경책이 아니었다면 흐트러진 마음을 살피고 다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철을 무사히 넘기고 다음 철 어느 저녁에 서암 스님을 찾아갔을 때도 스님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화두에 집중되는 시간이 처음엔 일이십 분 정도였다가 한 시간으로 늘어나더니 이젠 한나절도 쉽게 보내고 하루도 쉽게 보내고 있습니다. 밤잠을 안자도 피곤한 줄 모르고 화두가 치밀하게 들리는 것 같긴 한데, 과연 공부가 잘되고 있는 것인지 어쩐지 몰라 점검을 받으러 왔습니다.”

혼자 묵묵히 화두를 챙기며 몰두하는 사람이 수행을 잘하는 사람이오, 공부가 어느 정도 익어가고 있으니, 그럴수록 하심하면서 마음을 계속 잡아가세요. 공부가 잘될수록 더욱 조심스럽고 더 면밀하게 마음을 살피며 공부해 나가는 게 중요하오.”


화두가 잘 들리고 공부가 무르익을지라도 라는 상을 온전하고 겸허하게 비워내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이것이 서암 스님이 내게 단단히 일러 준 가르침이었다.

비단 수행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잘 여문 벼와 같은 마음을 갖추기란 어려운 만큼 중요한 일이다. 계획된 일이 잘 안 될 때는 자신을 돌아보기가 쉽지만, 마음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일이 잘될 때는 그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소위 잘 나갈 때, 행여 내가 설익은 벼와 같은 건 아닌지 자신을 두세 배로 살피고 돌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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